에두아르도 두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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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두아르도 두알데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인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로마스 데 사모라에서 변호사, 시장, 국회의원, 부통령, 주지사를 역임했다. 1970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로마스 데 사모라 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76년 쿠데타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1983년 민주주의 회복 후 시장에 당선되었고, 1987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하원 부의장을 지냈다. 1989년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주지사를 역임했다. 2002년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속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경제 정책을 추진했으나,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 201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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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도 두알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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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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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e Du-al-de |
출생일 | 1941년 10월 5일 () |
출생지 | 로마스 데 사모라, 그란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배우자 | 힐다 베아트리스 곤살레스 |
정당 | 정의당 |
모교 |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
대통령 (직무 대행) | |
순서 | 54대 |
임기 시작 | 2002년 1월 2일 |
임기 종료 | 2003년 5월 25일 |
전임 |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대통령 직무 대행) |
후임 |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
부통령 | |
임기 시작 | 1989년 7월 8일 |
임기 종료 | 1991년 12월 10일 |
대통령 | 카를로스 메넴 |
전임 | 빅토르 이폴리토 마르티네스 |
후임 | 카를로스 루카우프 |
상원 의원 | |
임기 시작 | 2001년 12월 11일 |
임기 종료 | 2002년 1월 2일 |
선거구 | 부에노스아이레스 |
제헌 의회 의원 | |
임기 시작 | 1994년 5월 1일 |
임기 종료 | 1994년 8월 22일 |
선거구 | 부에노스아이레스 |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 |
임기 시작 | 1991년 12월 10일 |
임기 종료 | 1999년 12월 10일 |
부지사 | 라파엘 로마 |
전임 | 안토니오 카피에로 |
후임 | 카를로스 루카우프 |
하원 의원 | |
임기 시작 | 1987년 12월 10일 |
임기 종료 | 1989년 7월 6일 |
선거구 | 부에노스아이레스 |
로마스 데 사모라 시장 | |
임기 시작 | 1983년 12월 11일 |
임기 종료 | 1987년 12월 10일 |
전임 | 군사 정부 |
후임 | 우고 톨레도 |
임기 시작 | 1974년 8월 8일 |
임기 종료 | 1976년 3월 24일 |
전임 | 페드로 파블로 투르네르 |
후임 | 군사 정부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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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및 정치 경력
에두아르도 두알데는 1970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정의당 소속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73년 로마스 데 사모라 시장에 임명되었으나,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인해 해임되었다.[4][6] 1983년 민주화 이후 다시 시장에 당선되었고, 라울 알폰신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 기도를 보고하기도 했다.[6][7][8] 1987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아르헨티나 하원 부의장을 지냈다.[9]
1989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행정 업무를 선호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주지사로 출마, 당선되었다.[54] 이후 1994년 아르헨티나 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메넴과 갈등을 빚었으며, 1999년 대선에서는 페르난도 데 라 루아에게 패배했다.[15]
2. 1. 초기 생애

에두아르도 알베르토 두알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광역권에 위치한 로마스 데 사모라에서 태어났다. 1970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이듬해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장을 맡았다. 정의당에 입당하여 곧 지역 지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시의회는 시장 리카르도 오르티스와, 그 이후 시장으로 임명된 페드로 터너를 탄핵했는데, 이는 다니엘 페론 대통령이 추진한 정치 개편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 두알데는 1973년 시장으로 임명되었다.[4]
두알데는 파스코 학살 당시 로마스 데 사모라에서 많은 페론주의 청년들이 살해된 사건에 대해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을 비난했다.[5] 그는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인해 공직에서 쫓겨났으며,[6] 그 후 몇 년 동안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했다.[54]
2. 2. 정치 경력
에두아르도 알베르토 두알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광역권에 위치한 로마스 데 사모라에서 태어나 1970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듬해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장을 맡았으며, 정의당(PJ)에 입당하여 지역 지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1973년에는 시장으로 임명되었고,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인해 공직에서 쫓겨날 때까지 파스코 학살에 대해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을 비난하는 등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4][5][6] 이후 몇 년 동안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했다.[54]
1983년 민주주의 회복 후, 두알데는 로마스 데 사모라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그는 새로 선출된 라울 알폰신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 시도를 보고하고 거부하기도 했다.[6][7][8] 1987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아르헨티나 하원 부의장을 역임하며 약물 중독 퇴치를 위한 위원회를 설립했다.[9]
1989년 대선에서 정의당의 카를로스 메넴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두알데는 입법 활동보다는 행정 업무를 선호하여 메넴의 제안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주지사로 출마, 당선되어 안토니오 카페이에로의 정치적 영향력을 종식시켰다.[10][11][54]
두알데는 메넴의 임기 후 1995년 대선 출마를 희망했지만, 메넴은 1994년 아르헨티나 헌법 개정을 통해 재선을 추진했다. 두알데는 주 헌법 개정을 통해 재선에 성공했고, 메넴 역시 1995년 총선에서 재선되었다. 이후 두알데는 메넴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페론주의 노선을 강조했다.[12][13]
1999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메넴과 갈등을 겪었고, 여러 스캔들로 인해 정치적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결국 1999년 대선에서 페르난도 데 라 루아에게 패배했다.[14][15]
2001년 폭동으로 데 라 루아 정부가 붕괴된 후, 두알데는 데 라 루아로부터 쿠데타를 조직했다는 의심을 받았다.[16] 그러나 두알데는 데 라 루아의 실각에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했다.[18]
3. 부통령 및 주지사 시절
1989년 대선을 앞두고 정의당은 카를로스 메넴 라리오하 주 주지사와 안토니오 카페이에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주지사 간의 예비 선거를 치렀다. 메넴이 이 선거에서 승리했고, 두알데는 그의 부통령 후보로 나서 본선에서 승리했다. 두알데는 입법 활동보다 지역 행정 업무를 선호했다.[54] 메넴은 그에게 인구가 많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주지사로 출마할 것을 제안했고, 두알데는 주에 대한 대규모 예산 지원을 조건으로 수락했다. 이 제안은 의회에서 라울 알폰신 대통령에 의해 지지되었고, 이는 두 정치인 간의 동맹으로 이어졌다.[10] 두알데는 주지사로 선출되어 카페이에로의 정치적 영향력을 종식시켰다.[11]
카를로스 메넴의 임기가 끝난 후인 1995년, 두알데는 대선 출마 의향을 밝혔으나 메넴은 1994년 아르헨티나 헌법 개정을 통해 두 번째 대선 연임을 추진했다. 두알데는 예비 선거에서 메넴을 이길 수 없었기에 주 헌법 개정을 통해 재선을 허용하려 했다. 정의당은 제헌 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고, 광역 전선, MODIN 등 세 개의 반대 정당은 재선 방지를 위해 "삼자 동맹"을 결성했다. 결국, MODIN은 입장을 바꿔 지방 국민 투표에서 이를 승인한다는 조건으로 재선을 지지했다.[12] 국민 투표를 통해 두알데의 재선이 허용되었고, 그는 본선에서도 승리했다. 메넴 역시 1995년 총선에서 재선되었다. 이후 두알데는 메넴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며, 그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버리고 페론주의 교리에 더 가까운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3. 1. 1999년 대선 출마
1994년 아르헨티나 헌법 개정으로 단 한 번의 재선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정의당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이후 당의 지도력에 대한 내부 논의를 시작했다. 에두아르도 두알데는 1995년 선거 직후 1999년 대선 출마 의사를 발표하면서 메넴과 치열한 분쟁을 겪었다. 메넴은 임기 제한에도 불구하고 "메넴 '99" 광고 캠페인을 추진하여 레임덕으로 여겨지는 것을 피하려 했다.[14] 그는 팔리토 오르테가에게도 대통령 출마를 권유했다. 두알데의 정치적 이미지는 여러 스캔들로 얼룩졌고, 탐사 보도 기자들에 의해 폭로된 문제들이 있었다. 일부 스캔들은 에콰도르와 크로아티아에 대한 아르헨티나 무기 판매 스캔들과 같이 국가 정부와 관련된 것으로, 정의당 전체의 평판을 훼손했다. 다른 스캔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경찰의 부패 사건 및 호세 루이스 카베자스 사진 기자의 살인 사건과 같이 두알데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정의당은 1997년 중간 선거에서 패배했고, 메넴은 "메넴 '99" 캠페인을 갱신했다. 결국 대법원은 그의 대선 출마 시도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오르테가는 두알데의 티켓으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두알데는 급진적인 페르난도 데 라 루아에게 패했다.[15]4. 대통령 재임 (2002-2003)
두알데는 라울 알폰신과 그의 정당, 노동조합, 교회와 함께 국가 산업 성장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아르헨티나 산업 연합 대표 호세 이그나시오 데 멘디구렌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경제부와 외교부 기능을 통합한 생산부를 신설했다.[25]
두알데는 취임 연설에서 페소 고정 환율제 폐지와 평가 절하를 발표했다. 초기 예상과 달리 200%의 평가 절하가 이루어져 1페소 대 1달러 환율이 3페소 대 1달러로 급등했다.[26] 수출 증가, 경제 활동 및 고용률 증가를 가져왔지만, 생활비도 상승했다.[27]
"페소화"라는 통화 대체 과정에서 환율 문제가 발생했다. 두알데는 ''코랄리토'' 해제와 함께 "달러 예금자는 달러를 받는다"고 약속했지만, 외환 보유액 부족으로 불가능했다.[28] 결국 달러 계좌는 1.4 환율로 "페소화"되었고, 국가는 은행에 자금을 지원했다. 공공 서비스 세금은 "페소화"되어 현재 가치로 고정되었다.[29]
평가 절하와 "페소화"로 대부분 산업은 수출 경쟁력을 확보, 경제 회복을 시작했다.[30] 2002년 7월 대두 국제 가격 급등, 수입품 가격 상승으로 인한 수입 대체 산업화 촉진, 현지 물가 하락으로 국제 관광 증가는 경제 회복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31],[32]
호르헤 레메스 레니코프 사임 후, 로베르토 라바냐가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긴축 재정 및 통화 정책으로 물가와 환율을 안정시키고 하이퍼인플레이션 위기를 막았다.[34]
카를로스 메넴과의 불화는 두알데 대통령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메넴은 2003년 선거 재선을 노렸고, 두알데는 이를 막으려 했다. 아베야네다 학살 이후 두알데는 선거를 6개월 앞당기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지지했다.[36]
9.11 테러 이후 미국 외교 정책이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되면서, 아르헨티나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다. 미국이 지원을 거부하자 두알데는 거리를 두는 정책을 선택했다.[40] 쿠바 인권 침해 비난 유엔 투표에 찬성했지만,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군대 파견은 거부했다. 임기 말, 미국 비판 수위를 높이고 쿠바 관련 투표를 기권으로 변경했다.[41]
스페인 서비스 제공업체 세금 인상 불허로 스페인과 외교 갈등이 발생했다.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가 대화했지만, 세금은 인상되지 않았다.[42]
4. 1. 대통령직 승계

데 라 루아는 경제 위기 동안 국가를 이끌었고, 2001년 12월 폭동 중에 사임했다. 부통령도 몇 달 전에 이미 사임했기 때문에, 의회는 새로운 대통령을 임명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인구가 적고 페론주의 주지사가 있는 11개 주는 "연방 전선"이라는 블록을 형성했고, 산 루이스 주 주지사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를 임명하는 데 필요한 표를 얻었다.[19] 로드리게스 사아의 첫 번째 행정 조치는 새로운 시위를 촉발했고, PJ는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차파드말랄에서 주지사들과의 회의를 소집했지만, 23명의 주지사 중 6명만이 참석했다. 그는 며칠 후 사임했고,[20] 코르도바 주 주지사인 호세 마누엘 데 라 소타와 함께 두알데가 그를 음모했다고 비난했다.[21]
의회는 새로운 대통령을 임명하기 위해 다시 소집되었다. "연방 전선"은 로드리게스 사아의 실패로 약화되었고, 인구가 더 많은 주들은 영향력을 키웠다. 유력한 후보는 두알데, 데 라 소타, 그리고 당시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주지사였던 카를로스 루카우프였다.[19] 여전히 자신에게 충성하는 의원들을 가지고 있던 메넴은 두알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고, 미시오네스 주 주지사인 라몬 푸에르타를 대신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푸에르타는 의회가 처음 심의하는 동안 임시 대통령이었지만, 그는 대통령으로 임명되거나 두 번째로 임시 대통령으로 봉사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에두아르도 카마뇨가 그 결과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22] 푸에르타는 두알데와 이야기했고, 데 라 루아와 알바레스가 없이는 1999년 선거에서 2위를 했고, 인구가 가장 많은 아르헨티나의 지역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에서 2001년 입법 선거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그가 대통령으로 임명될 정당성이 가장 높은 정치인이라고 말했다.[23] 알폰신은 두알데에게 결정적인 지원을 제공하여, 급진파 의원들에게 그에게 투표하도록 지시했고, 그에게 급진파인 오라시오 자우라레나와 호르헤 바노시 두 명의 장관을 주었다. 메넴에게 충성하는 의원들도 결국 두알데에게 투표했다. 급진파의 지원으로 두알데는 로드리게스 사아의 경우처럼 90일 동안 통치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는 대신, 데 라 루아의 남은 임기 동안 통치할 수 있었다.[24] 두알데는 2002년 1월 2일에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4. 2. 경제 정책
페소 고정 환율제를 폐지하고 평가 절하를 단행했다. 처음에는 40% 평가 절하가 예상되었지만, 실제로는 200% 평가 절하가 이루어져 1페소 대 1달러 환율이 3페소 대 1달러로 급등했다.[26] 이로 인해 수출이 증가하고 경제 활동과 고용률이 높아졌지만, 생활비도 함께 상승했다.[27]달러로 이루어진 금융 거래는 "페소화"라는 통화 대체가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환율 문제가 발생했다. 시장 환율을 적용하면 대부분의 채무자가 파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10만 달러 미만 거래에는 1:1 대체가 적용되었다.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이 뱅크런을 막기 위해 도입한 ''코랄리토''(은행 계좌 인출 제한 조치)도 논란이 되었다. 두알데는 "달러 예금자는 달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이는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액 부족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달러 계좌는 1.4의 환율로 "페소화"되었고, 국가는 은행에 자금을 지원했다.[28] 공공 서비스 세금은 "페소화"되어 현재 가치로 고정되었다.[29]
평가 절하와 "페소화" 덕분에 대부분의 산업은 수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여 이익을 얻었고,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30] 2002년 7월 대두 국제 가격 급등도 경제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31] 수입품 가격 상승은 수입 대체 산업화를 촉진했고, 현지 물가가 달러 기준으로 저렴해지면서 국제 관광이 증가했다.[32]
호르헤 레메스 레니코프 경제부 장관이 사임한 후, 로베르토 라바냐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라바냐는 긴축 재정 및 통화 정책을 통해 물가와 환율을 안정시키고, 하이퍼인플레이션 위기를 막았다.[34] 경제의 유휴 능력을 활용한 것도 경제 회복에 기여했다.[35]
4. 3. 국내 정책
두알데 대통령의 임기는 카를로스 메넴과의 불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메넴은 2003년 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이 되려고 했고, 두알데는 이를 막으려 했다.[36] 두알데는 메넴을 꺾을 수 있는 다른 후보들을 찾았지만, 카를로스 레우테만, 호세 마누엘 데 라 소타,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펠리페 솔라, 로베르토 라바냐 등과의 협상은 실패했다.[36] 아베야네다 학살에서 피케테로 막시밀리아노 코스테키와 다리오 산티얀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두알데는 선거를 6개월 앞당겨야 했다.[36] 결국 두알데는 산타 크루스 주 주지사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선택했다.[37]키르치네르는 여론 조사에서 5위였고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두알데는 메넴이 처음에는 많은 표를 얻겠지만 인기가 매우 없어서 결선투표가 필요하면 대부분의 국민이 메넴을 이길 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38]
메넴의 승리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2003년 선거에서는 레마 법의 변형된 방식이 사용되었다. 정의당의 메넴, 키르치네르, 로드리게스 사아는 예비 선거 없이 바로 공개 선거에 출마했다. 세 후보는 정의당 후보가 아닌 특별히 만들어진 정당으로 출마했는데, 메넴은 "충성 전선", 키르치네르는 "승리 전선", 로드리게스 사아는 "국민 대중 운동 전선"으로 출마했다. 또한 라바냐는 키르치네르 대통령 임기 동안에도 경제 장관으로 남아 경제 정책의 연속성을 보여주었다. 메넴은 인기 있는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키르치네르를 이겼지만, 결선 투표에서 패배할 것을 우려하여 출마를 포기했다.[39]
4. 4. 외교 정책
두알데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외교 정책이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되었을 때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아르헨티나 사회가 미국과의 양자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한 그룹은 아르헨티나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외국 도움을 필요로 할 수 있으므로 지난 10년간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다. 다른 그룹은 더 거리를 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다. 두알데는 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고, 결국 미국이 아르헨티나를 돕기를 거부하면서 두 번째 선택으로 기울었다.[40]아르헨티나는 쿠바의 인권 침해를 비난하는 유엔 투표에 찬성했지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알데는 평화 유지군을 파견할 것을 제안했으며, 사담 후세인 정권과 국제 테러리즘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두알데는 임기 말에 미국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높였고, 쿠바 관련 투표를 기권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변화는 2003년 선거를 앞두고 동기가 부여되었다. 세 번째 임기를 위해 대통령 출마를 준비하던 카를로스 메넴은 쿠바를 비난하는 투표와 미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지지했다.[41]
평가 절하는 두알데가 스페인 서비스 제공업체의 세금 인상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스페인과의 외교적 갈등을 야기했다. 지금까지 이들은 달러 환율에 따라 수입을 받았으며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려고 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위기의 영향이 이미 국민에게 충분히 심각하며 추가적인 가격 인상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판단했다.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는 스페인 기업을 대표하여 두알데와 대화했다.[42] 세금은 인상되지 않았지만 아스나르는 두알데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2003년 선거의 승자와 관계없이 아르헨티나와의 좋은 관계를 재확인했다.[43]

5. 대통령 퇴임 이후
두알데는 2003년 5월 25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44] 이후 201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6%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하며 낙선했고, 그의 아내 힐다 두알데는 상원 의원 재선에 실패했다.[52] 2017년 정의당 대표로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53]
5. 1. 키르치네르와의 관계
두알데는 2003년 5월 25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 키르치네르는 곧 두알데와 거리를 두었고, 두알데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두알데 측근들을 정부에서 모두 내쫓았다. 키르치네르는 또한 당 내에서 두알데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사회 및 정치 분야에서 지지자를 모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개적인 분쟁을 늦추고 2003년 국회의원 선거 기간 동안 함께 협력했다.[44]분쟁은 2005년 중간 선거에서도 계속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상원 의원 후보를 단일 후보로 내는 것에 대해 정의당(PJ) 내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두 지도자는 각자의 아내를 출마시켰다. 힐다 두알데는 PJ 소속으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키르치네르가 유지하고 있던 승리를 위한 전선 소속으로 출마했다.[45]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가 그 선거에서 승리했다.[46]
2009년 12월 23일, 두알데는 201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발표했다.[47]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아 있었으며, 2011년 선거에 누가 출마할지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많은 시장들은 두알데를 지지할지, 키르치네르를 지지할지 확신하지 못했다.[46] 두알데는 키르치네르에 반대하는 PJ 소속 인사들과 함께 ''연방 페론주의'' 파벌을 조직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2010년 10월 사망했으며, 그 뒤 국장으로 인해 선거 운동이 몇 달 동안 중단되었다.
연방 페론주의는 두알데와 알베르토 로드리게스 사아 주지사 간의 2011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예비 선거를 조직했으며, 이는 의무 예비 선거 전에 치러질 예정이었다.[48] 펠리페 솔라 주지사와 마리오 다스 네베스는 후보직에서 사퇴했다.[49] 두알데는 예비 선거가 끝날 무렵 후보직에서 사퇴했다.[50] 로드리게스 사아는 단독 후보로 연방 페론주의에 출마했으며, 다른 지방 정당들과 연합하여 연방 헌신 연합을 결성했다. 두알데 역시 인민 연합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51] 그는 본선에서 6%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주요 후보들의 득표수와 큰 차이를 보였으며, 힐다 두알데는 상원 의원 재선에 실패했다.[52]
5. 2. 2011년 대선 출마
2009년 12월 23일, 두알데는 201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발표했다.[47]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아 있었으며, 2011년 선거에 누가 출마할지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많은 시장들은 두알데를 지지할지, 키르치네르를 지지할지 확신하지 못했다.[46] 두알데는 키르치네르에 반대하는 정의당(PJ) 소속 인사들과 함께 연방 페론주의 파벌을 조직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2010년 10월 사망했으며, 그 뒤 국장으로 인해 선거 운동이 몇 달 동안 중단되었다.
연방 페론주의는 두알데와 알베르토 로드리게스 사아 주지사 간의 2011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예비 선거를 조직했으며, 이는 의무 예비 선거 전에 치러질 예정이었다.[48] 펠리페 솔라 주지사와 마리오 다스 네베스는 후보직에서 사퇴했다.[49] 두알데는 예비 선거가 끝날 무렵 후보직에서 사퇴했다.[50] 로드리게스 사아는 단독 후보로 연방 페론주의에 출마했으며, 다른 지방 정당들과 연합하여 연방 헌신 연합을 결성했다. 두알데 역시 인민 연합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51] 그는 본선에서 6%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주요 후보들의 득표수와 큰 차이를 보였으며, 힐다 두알데는 상원 의원 재선에 실패했다.[52]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89년 선거 | 아르헨티나의 부통령 | 30대 | 국민 연합 정의 전선 | 47.49% | 7,954,191표 | 1위 | |
1999년 선거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 42대 | 정의당 | 38.94% | 7,100,678표 | 2위 | 낙선 |
2011년 선거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 45대 | 대중연합 | 5.86% | 1,285,830표 | 5위 | 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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